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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 때 볼만한 알쓸신잡

10.26사태 박정희, 김재규

by 블루바이럴 야채토스트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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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사태 박정희, 김재규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126사건, 12육정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등으로 불립니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몰락했습니다.

 

역사적 배경입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1인 정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했습니다. 특히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1972년 10월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정치 경제적 모순이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은 이 부문에의 중복, 과잉 투자에 의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목의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지만 1979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한국 경제의 고성장 전략 추진 과정에서도 유례없는 18.3%에 달했습니다.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상받으려 했지만 독재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민심은 체제를 외면했습니다. 또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통한 고도성장 전략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대적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경제위기 심화 과정에서 이들 계층의 소외감도 점차 심화됨에 따라 이들의 생존권 요구도 심해졌습니다.
대외적으로는 1977년 출범한 미국의 카터(Carter, J.)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미군 철수라는 카드를 이용해 한국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거부해 한미 간 갈등이 증폭됐습니다. 또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시도해 미국을 자극했습니다.
이에 박동선 사건까지 겹치면서 한미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야 세력과 야당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습니다. 1972년 유신체제 출범 이후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 구속 등이 계속됐지만 민주화 방향을 거스르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1978년과 1979년은 정치 경제적 모순이 정치적 위기로 이어진 시기였습니다.

1978년 동일방직 사건과 함평 고구마 매입 사건 등의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급격히 높인 사건이었습니다. 그해 12월 12일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올려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 31.7%를 웃돌게 되었는데 이는 민심이반주 01 현상이 표출된 사례입니다. 이에 집권 여당은 위기감을 갖게 됐기 때문에 극단적인 강경 대응 외에는 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1979년 안동교구 천주교 농민회의 오원춘 사건은 유신정권과 천주교 세력의 정면충돌을 일으켰습니다. 1979년 8월 YH 사태는 이전의 노동 소요가 절정에 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YH무역은 소규모 수출업체로서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습니다.
YH노조 여공들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당시 김영삼 총재 밑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투쟁을 전개했던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습니다. 경찰은 지난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 안으로 진입했고,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했습니다.이에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사인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YH사태는 소규모의 비항적 노사갈등에 불과했지만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습니다. 야당을 비롯한 범민주화운동 세력과 유신정권 간의 극한 대립을 야기한 것입니다. 김영삼은 유신철폐의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중도통합론을 표방한 이철승을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꺾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했습니다.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고 외신기자클럽과의 회견에서 통일을 위해 김일성을 만날 용의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 축출을 시도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하고 김영삼의 정적인 이철 승계 인사가 전당대회 결과 무효를 제소했고 법원은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했습니다.
국회는 심지어 김영삼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4일 김영삼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야당까지도 제도권 정치의 테두리 밖으로 내모는 국면을 초래했습니다. 그동안 쌓였던 국민들의 불만이 김영삼의 출축을 계기로 폭발했습니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창원 등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유신 체제의 종말을 초래한 부마 항쟁이었고, 이 지역은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이기도 했습니다.
10월 15일 시위는 부산대학교 학생 시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시위는 주동자가 연행되면서 확산되지 않았고 본격적인 시위는 16일부터 진행됐습니다. 지난 16일 교내에서 집회를 가진 부산대 학생들이 시내에 진출했고, 여기에 동아대·고려신대, 고등학생, 전문대생 등의 학생에 일반 시민까지 가세했습니다.
3,000여 명의 시위대는 게릴라식으로 경찰과 충돌해 자정까지 격렬한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지난 17일에는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날이 저물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됐습니다. 시민들의 호응 속에 시위 군중은 경찰서, 파출소, 세무서, 동사무소, 신문사, 방송국 등에 투석했습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16일부터 17일 이틀간 경찰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됐으며 21개 파출소가 파손되거나 방화됐습니다. 18일 0시에는 부산시 일대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 등 군 병력이 투입되어 시위 군중을 진압했습니다. 18일에는 경남 마산 일대에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경남대에 무기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오후 6시쯤부터 시작된 시위는 곧 2000명의 시위 군중을 이루며 공화당사를 공격해 파출소·신문사·방송국·법원·검찰청·동사무소 등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지난 19일 밤에도 마산·창원 지역에 이 같은 사태가 이어지자 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박정희 퇴진을 요구한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던 부마 항쟁은 강경 진압으로 일단 해결되었지만, 그 대응 방식을 둘러싼 집권층 내부의 갈등을 야기하며 10·26 사태를 발생시켰습니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 항쟁에 관한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측은 서로 경쟁적인 입장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의 입장을 수용하고 강경 진압을 채택하자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 위기에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만찬 도중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했습니다. 김재규는 군 후배 차지철의 월권과 자신에 대한 무시, 그리고 그에 대한 대통령의 편애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날도 박정희는 부마항쟁의 책임을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로 전가하며 대지철도 중앙정보부의 무능함을 지적했습니다.

 

의의와 평가입니다.
10·26 사태 직후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고, 10월 말 군부 고위층은 유신헌법 폐기를 결정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전두환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1026 사건을 사전에 몰랐다고 주장했습니다.
10·26 사태는 유신 체제를 무너뜨린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김재규가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화를 위한 의거'는 아니었습니다. 이전부터 민주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던 김재규가 의거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서둘러 만들어낸 사후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김재규와 그 수하인 중앙정보부 요원이 조직적으로 가담하긴 했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며 차지철과의 개인 감정이 표출된 우발적인 범행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사전 모의는 하지 않고 다만 '거사후 연대'를 시도하기 위해 10·26 당일 궁중동 안가의 별실로 초대됐었습니다. 그러나 정승화는 연대를 거부하여 쿠데타로 나아가지 못했고, 결국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집권할 빌미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10·26 사태로 민주화되기보다는 권위주의 통치가 연장된 것입니다. 대통령의 시해는 박정희의 독재를 무너뜨리는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김재규의 명분론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최측근이 살해했다는 것도 동양적 유교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후속 정부도 이런 역사적 선례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김재규 일당은 사형당했고, 10·26 사태에 대한 법적 심판은 일단락됐습니다.
법적 심판은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습니다. 10·26 사태 종결 과정에서 12·12 사태가 벌어지는 등 민주화가 지연되기도 했지만, 10·26 사태 자체는 민주화를 요구한 부마항쟁으로 촉발되어 보다 장기적으로는 유신 체제의 붕괴와 군부 독재 종식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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