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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할 때 볼만한 알쓸신잡

1.21사태 김신조 사건, 무장 게릴라 청와대 습격

by 블루바이럴 야채토스트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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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 김신조 사건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입한 사건입니다.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은 그해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에게 청와대 습격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8일 0시를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했습니다.

서부전선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해 하룻밤을 숙영, 19일 저녁 8시 30분경 임진강 얼음 위를 횡단, 당시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삼봉산에서 이틀째 숙영을 한 뒤 20일 앵무봉을 통과해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도를 타고 같은 날 밤 10시 서울 세검동파출소 관할 자하문초소에 도착했습니다.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되자 일당은 "방첩대원입니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갑시다." 등의 위협적인 말을 서슴지 않고 행진을 이어갔다. 약 400m를 행진할 무렵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게릴라들이 먼저 자동소총을 쏘면서 수류탄을 던졌어요.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때부터 게릴라들은 현장을 지나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던져 승객들에게 부상을 입히거나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지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들과 격투를 벌이다 총격으로 숨지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됐습니다.
군경합동수색팀은 일당 중 김신조를 발견, 체포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그날 밤 게릴라 5명을 사살한 데 이어 경기도 일대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벌여 31일까지 28명을 사살했습니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습니다.
이들이 장비한 습격용 무기는 기관단총(PPS) 31정(1인당 1정씩 휴대), 실탄 9300발(1인당 300발씩 휴대), TT권총 31정(전원 휴대),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방어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단도 31정(전원 휴대)이었습니다.
북한 민족보위성은 김일성의 이른바 항일 빨치산 전술에 따라 대남 적화공작에서 적극적인 유격전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67년 4월 정찰국 산하에 유격전 특수부대인 제124군부대를 조직했습니다.
이 특수부대는 일반 군부대에서 선발된 척후병·통신병·운전병·특무장 등과 제283군부대 및 집단군 도보정찰소에서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연산과 상원 일대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 훈련을 받았으며 특수교육의 내용은 적 배치 상황이론, 지뢰 극복을 위한 정찰병 기본 동작, 지형학, 사격, 침투 훈련 등이었습니다.
8개 기지 중 제6기지에서 서울·경기도 지역에 대한 유격파괴 공작을 담당하다가 1968년 1월 2일 민족보위부로부터 청와대·미대사관·육군본부·서울교도소·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일제히 습격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이에 따라 제6기지 유격대는 장교 25명의 유격대원을 엄선해 같은 해 1월 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으로 이동, 노동당 도당청사를 청와대로 가상하고 청와대 정문 사진과 전경 사진을 익히면서 습격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지난 1월 13일, 정찰국장 김정태는 이 훈련 장소를 방문, 독려하고 습격 대상을 청와대로 지정했습니다.
특공대의 규모는 당초 25명에서 31명으로 증원되었고, 모두 함경도 출신 장교로 충원되었습니다. 이들은 1월 14일부터 이틀간 집단 사격 훈련을 받은 뒤 남파되었는데 기습 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습격 시간은 저녁 8시이며 당일에 복귀합니다. 습격 소요시간은 3~4분이며 증원군의 추격을 받지 않도록 합니다. ② 피습 전날 북악산 부근에 숙영하면서 청와대를 관측, 정찰합니다. ③ 전원 사복으로 갈아입고 취객으로 가장해 접근, 유격대원들끼리 싸우다가 기회를 잡고 청와대 초소를 기습합니다.
④ 1조는 청와대 2층을 기습, 기관단총으로 무차별 사격하고 인원을 살상하고 수류탄을 투척합니다. 제2조는 청사 1층, 제3조는 경호실, 제4조는 비서실, 제5조는 정문의 경비원 및 기타 경비원 등을 인수하여 살상, 파괴합니다. 운전조는 차량을 탈취하고 탈출 준비를 완료합니다.
⑤ 습격이 끝나면 바로 분승하여 문산 방면으로 도주, 그날 복귀합니다.
정부는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 국회 국방위원회에 사태의 진상을 설명했습니다. 또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는 사건이 돌발하기도 했습니다.
1월 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261차 군사정전회의 본회담에서 유엔군 측 수석대표는 푸에블로호 사건과 함께 북한 게릴라 부대의 서울 침투와 민간인 살상 등의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북측은 남한이 휴전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121사태는 본회담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무리한 답변으로 이들의 만행을 호도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남북 대화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이 사태가 좌경화된 분자의 행동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 창설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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